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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실은 조선 시대의 과학자이자 발명가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으며 다양한 과학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자격루, 혼천의, 측우기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뛰어난 발명가에 대하여 그의 생애, 발명 그리고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장영실 표준영정(박영길作)
    <장영실 표준영정:박영길 作>

    장영실의 성장과정

    장영실의 태어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1385년에서 1390년경에 경상남도 동래현(현재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장성휘으로, 원래 원나라의 소주항주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고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영실은 어머니가 천민(기생)이어서 어머니의 신분을 이어받아 천민이었습니다. 장영실은 어려서부터 기계 만들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동래현의 읍내에서 쇠붙이나 나무를 구해 가지고 와서 기계를 만들곤 했습니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장영실이 살고 있던 동례현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멀리 있는 강에서 물을 끓어 올 수 있게 만든 수차(양수기 펌프)를 만들어내어 동래현에 들었던 가뭄을 해결하였고 이 이야기가 세종의 귀에 들어가 장영실을 발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영실의 기계 만들기 재능은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태종 때 발탁된 것으로 보입니다. 태종은 장영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궁중기술자로 일하게 했습니다. 장영실은 궁중에서 농기구, 축성 제련, 무기 등의 수리에 매우 뛰어났습니다. 1421년(세종 3년), 세종대왕은 장영실을 최천구, 윤사웅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장영실은 중국에서 천문기기, 지리학, 의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귀국한 장영실은 1423년(세종 5년) 천문기기를 만들었고 세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천민의 신분에서 면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장영실은 종 5품 상의원 별좌에도 오르게 됩니다. 세종은 1424년(세종 6년) 장영실을 정 5품 행사직으로 승진시켜 물시계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갱점지기'였습니다.

     

    장영실의 전성기

     

     

     

     

    장영실은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으며 다양한 과학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자격루, 혼천의, 측우기 등이 있습니다. 자격루는 세계 최초의 자격식 물시계입니다. 자격루는 물을 저장하는 용기, 물이 흘러가는 수로, 시간과 분을 나타내는 부표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격루는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으며, 조선의 궁궐과 관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혼천의는 하늘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천문 관측 장치입니다. 혼천의는 천구의, 지구의, 운행체 등 다양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혼천의는 하늘의 별자리와 행성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었으며, 조선의 천문학 연구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측우기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양을 측정하는 기구입니다. 측우기는 유리관으로 된 측우기와 측우기를 고정하는 받침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의 양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측우기로 인하여, 조선의 농업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장영실의 발명으로 세종은 그를 더욱 총애하여 1433년(세종 15년)에 정 4품 호군의 관직에 오르게 됩니다. 이외에도 장영실은 앙부일구, 간의, 옥루, 수표, 격구 등의 다양한 과학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조선의 과학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장영실의 말년에 대한 논란

    장영실이 관직생활을 하던 중 1442년 (세종 24년) 세종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장형을 받은 후 파직되게 됩니다. 그 후 역사의 기록에서 장영실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세종의 어가 사건으로 장영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얼마 후 다시 복직되었는데 장영실만 기록에 나오지 않습니다. 추측하건대 장영실이 복직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데, 즉 그가 이미 고령이어서 다시 관직에 복직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 전기가 기록들이 임진왜란등의 전란으로 많이 소실되어 그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장영실의 본관에 대한 불분명하나 장영실이 아산 장 씨의 족보에 그들의 시조인 장서의 9대손이라고 적혀있다는 근거로 장영실을 아산 장 씨라고 주장하고 있고, 현재 충청남도 아산시에 위치한 아산장씨의 시조를 모신 묘소 바로 아래에 그의 가묘가 있습니다. 장영실은 이순지와 이천등과 함께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과학자이자 발명가입니다. 그의 업적은 조선의 과학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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